라이프 my life/이런저런

자격은 누가 만드는 걸까?

uchonsuyeon 2020. 11. 5. 12:01

'큰 아이가 선망의 대상이 되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하며 열심히 아이의 머리를 빗어주었다. 단정한 아이의 모습이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다. 그러다 문득, 나도 선망받던 것들에 대해 생각이 났다. 왜 그때는 '부럽다', '좋아 보인다', '예쁘다' 등등의 말을 그대로 듣지 않고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를 했을까?

 

친정에 가서 할 일 없을 때 들여다보았던 중학교 시절의 나는 예쁘더라. 예쁜 줄 모르고 굉장히 소극적이며 이기적으로 조용히 보냈다. 날씬해서 부럽다는 말에 되려 욕 듣는 기분을 느꼈다. 너무 마른 탓에 빈티 난다고 생각했었던 듯하다. 몸이 상상히 빼빼한 탓에 별명도 '소말리아'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좋은 말들을 많이 들었는데, 왜 그때에 나는 그런 소리 들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나를 어여삐 여겨주셨던 아빠는 '못생겼다'라고 늘 놀렸다. 표현이 서툴러서 그러셨을 테지만, 나는 그걸 믿었다. 못생겼다는 생각에서 조금 탈출하게 된 계기는 막냇동생이 한 말 때문이다.

- 누나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어. 평범해

누구는 평범하다는 말에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래도 평범은 하구나라'는 생각으로 안심했었다.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동생들이 예쁘고 잘생겨서 그럴 거다. 어려서부터 누구를 만나든 동생들을 칭찬했다. 더군다나 여동생은 깔끔하고 청소 정리도 잘하고 싹싹했다. 막내는 제법 잘생겨서 여자들이 잘 따랐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나는 못생겼고, 예쁘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 그저 책임감 있고 인내하며 고집스럽게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아이였다. 그림을 좀 그리고 자기 앞가림은 그럭저럭 하는 사람 말이다.

아빠는 인사와 겸손을 강조하는 분인데, 나는 그 겸손을 자기 비하와 엮어서 늘 생각했다. 사실 현재도 그런 듯하다. 누군가의 칭찬을 오롯이 들을 줄 모른다. 책으로 대화법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해도 좀체 되지 않는다. 겸손하면서도 나를 드러내기에 나 자신을 한 없이 낮추니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다. 

 

30살이 넘어가면 부모탓 환경 탓도 넘어서야 한다는데, 마흔도 넘어간 나는 아직도 한 발 정도는 걸치고 있나 보다. 

 

다행히 깨달음은 아이의 머리를 빗겨주면서도 온다. 나에 대해 조금은 자긍심을 갖출 비빌 언덕이 된다. 

 

누군가의 칭찬에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당신의 좋은 머릿결도 아름다워요. 

같이 나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칭찬하고 싶다. 그러려고 노력해야겠다.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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