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 뜻대로 살기 어렵다.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공간이 없어서 등의 여러 사정이 있다. 소풍을 가려고 해도 날씨운이 따라줘야 한다. 천재지변이 일어나 혹은 큰 사고가 일어나 본인의 뜻하지 않는 일에 맞닥뜨려져 하고자 하는 걸 못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이 세상의 순리라는 것일 게다. 물론이 순리와 상관없이 하늘을 거스를 정도의 의지와 행동력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일반인이므로 일반인 기준으로 보아야겠다.
어제는 간만에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했다. 어디 갈 일도 없었기에, 오전에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보통 예상대로라면 11시 이전에는 운동이 끝나야 하건만, 큰 아이가 딸기우유를 사달라며 나와 한바탕 했기 때문에 예상보다 늦게 시작해서 12시가 다되어서야 운동을 끝냈을 수 있었다. 점심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집에서 비빔면을 먹을 것이냐 근처 식당에서 비빔밀면을 먹을 것이냐. 운동을 하고 나면 보상심리가 따라온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운동을 했으니 나는 대우받을 권리가 있어라고 생각하고 밀면을 먹으러 갔다. 신나게 먹고 집으로 향하다 아이들의 아침거리를 사러 대형마트에 들렀다. 바나나와 빵류 그리고 유통기한이 다되어 세일하는 상품까지 주워 담고 뜨거운 태양을 저주하며 집으로 왔다. 이때 나는 그냥 집으로 들어왔어야 했다.
우리 집은 1층 주차장 공터에 고추와 대추토마토를 키우고 있다. 아이들에게 흙과 식물을 가까이하게 해주고 싶어서다. 물주는 걸 자주 잊어버려서 이 뜨거운 날씨에 축축 늘어진 게 보였다. 이 식물들에게 물을 주려면 내 엉덩이까지 올라오는 작은 담을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장바구니를 바닥에 놓고 작은 담을 넘어가 담옆에 놓아져 있는 물조리개를 들었다. 그 때 마침 윗 위층에 사는 주민이 큰 아이와 내려와 자전거를 타려고 했다. 서로 즐겁게 인사를 나누고 이 주민은 나에게 자신이 외출해서 돌아온 후에 커피타임을 하시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제안을 대부분 거절하지 않는다. 생각없이 승낙해버리고, 다시 담을 넘어와 주차장 구석에 있는 호수를 통해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 신나게 식물들에게 물을 퍼부어주었다.
윗집 주민과 헤어진건 대략 1시경이었다. 책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장미의 대화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네가 1시에 오면 12시부터 나는 널 기다릴 거야. (정확한 대사는 아니다. 대략 이렇다는 거다) 나는 장미의 심정이 되어서 소파에 앉아 윗집 주인을 마냥 기다렸다. 원래 오후 계획은 집청소를 한 후 목록에 적어둔 여러 가지 일들을 해치우는 것이었다. 기다리며 청소를 좀 해도 되겠지만, 손에 잡히지 않다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이윽고 2시 경이되어서 윗집 주민의 호출이 있었다. 나는 그 집에 딸이 둘이라는 걸 알았기에 메모지와 마스킹 테이프들을 몇 개 챙겨 올라갔다. 간만의 운동을 해서 그런지 몹시 졸렸다. 더군다나 비빔밀면처럼 짜고 매운 종류를 먹으면 상당히 졸리다. 졸린 눈을 부릅뜨고 있느라 고생했다. 우리 빌라는 같은 라인의 우리집 2층과 3층만 구조가 같고, 다른 집들과는 같은 라인이여도 구조가 다르다. 집집마다 다르고 남의 집에는 옆집말고는 가본적이 없어서, 집관련 대화부터 시작해 일과 여러가지 대화들을 이어나갔다. 그 집 둘 때 딸이 잦은 대화방해를 해왔지만, 남의 딸이라 마냥 귀엽더라. 엄마는 힘들어하는 기색이 영력 했다. 이해는 간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니 3시가 넘어 내려오게 되었다.
이렇게 시간을 쓰고나니 청소를 해서는 안되었다. 일했던 걸 보내야 했기 때문에 바닥에 돌아다니던 과자 부스러기가 발바닥을 잡고 물고 늘어졌지만, 컴퓨터를 켜고 앉았다. 업체 사장님과 대화를 하고 엑셀 파일에 정리만 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업체 사장님이 중간중간 뜸을 들이셔서 조금은 더디게 진행됐다. 그때 다른 친구가 연락이 왔다. 마침 그 친구에게 주려던 것이 있어 집으로 초청했다. 집이 매우 지저분하다는 경고는 했는데, 실제로 보고 많이 놀랐을 것이다. 친구와 약간의 대화를 하고 아이들을 픽업해오니 6시가 넘었다. 큰 아이는 이모들 방문을 상당히 좋아한다. 내친구 옆에 붙어서 친구가 돌아갈 때까지 꽁냥거렸다.
졸릴 때 눈을 붙이지 못하면 하루종일 졸리다. 9시 반이 되면 아이들도 재우고 나도 자면 되는 시간이다. 그런데 문득 청소가 너무 하고 싶었다. 2-3시 티타임후, 윗집 주민에게 스티커와 마스킹 테이프를 더 주겠다고 했더니 우리 집으로 따라 들어왔었다. 주민에게도 청소상태에 대해 미리 경고했지만, 그 주민은 우리 집에 들어와 집을 구경하면서 연신 발을 껄끄러워했다. 그렇다. 내가 내버려뒀던 과자 부스러기였다. 발을 껄끄러워하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방을 열심히 치우고 닦고, 쌓여있는 설거지 더미들도 해결하고 나니 밤 11시 반이었다. 아이들은 tv에 빠져 있느라 졸린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루가 이렇게 계획과는 다르게 지나간다. 오늘도 오후에는 진득하게 여러가지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큰 아이가 코피가 너무 난다며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가면 좋겠지만, 지금 가면 오늘 급하게 해야 할 일들을 못하니 일단 조금 더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며 누군가를 탓하게 된다. 사회의 부조리나 불합리에 대해서까지 화를 내게 된다. 근본도 대상도 정확하지 않는 화다.
세상은 내뜻과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데 화내서 무엇하겠는가. 마이클 싱어의 책 <될일은 된다>의 제목처럼 될 일은 되니까 마음을 조금 편안히 갖아도 될 텐데. 크게 숨 한번 쉬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하러 가야겠다.
후암 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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