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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 - 100개의 글쓰기] 나는 어떤 아줌마인가?

uchonsuyeon 2019. 7. 14. 23:15

문득 생각해 본다.
글로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아줌마인가?

보통 아줌마란?
1.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
2. 어린아이의 말로, ‘아주머니’를 이르는 말.
출처 - 표준 국어사전

 그렇다. 아줌마란 낮춰 불려지는 말이다.  ‘아줌마, 여기 반찬 더 주세요.’ 같은 느낌일 것이다. 

 결혼 전에 ‘아줌마’로 불린 적이 있다. 어린애들이 아줌마라 불렀었다. 아가씨들, 특히 나이 많은 미혼녀들이 ‘아줌마’란 말을 들으면 발끈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땐 그러지 않았다. 일단 ‘아줌마’가 아니었고, ‘아줌마’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마음의 준비를 해나가던 시기였다. 그런데 정작 내적 갈등을 일으켰던 건 ‘진짜 아줌마’가 되면서부터였다. 유부녀가 된다는 건 인생 길에서 15도 정도 각도가 바뀐 변화와 같다. 이때부터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아줌마’라 불리는 게 당연했지만, 그걸 받아들이는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유부녀가 되고 아이를 낳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과정을 그럭저럭 잘 견뎌냈던 건, 그래도 회사 다니는 아줌마여서 일거다.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나의 직급을 불러주는 오롯이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대우받는 곳이 있어서 가정의 변화들을 잘 지나쳐 왔다. 

 그런데 <회사 안은 전쟁이지? 회사밖은 지옥이다>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그저 지나쳐 왔던 일련의 과정들이 회사 밖을 나오면서부터 육아 지옥으로 돌아왔다. 직급과 이름이 빠진 ‘엄마’, ‘아줌마’의 자리는 온전히 나의 차지가 되면서 두어 달은 정신적 아줌마춘기의 과정을 겪었다. 가능한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반 정도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 정신적 숙련의 과정을 겪고 나니 육체적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몸이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 달은 넘게 아프고 회복의 시간을 맞이하고 나니 어느새 나는 약 50점짜리 아줌마가 되었다.(스스로 점수를 조금 후하게 줬다.) 스트레스받으며 힘들게 했던 육아와 가정일들이 당연히 내 몫으로 여겨지고 그저 일상이 되어 버렸다. 가끔 가만히 나를 돌아보면 깜짝 놀라곤 한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회사에 다니며 열일 하던 내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고, 밥 먹이고 재우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니 놀랍다. 아마 일 년 전에는 현재의 나를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이렇게 되기까지의 번뇌를 절대 예상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어떤 아줌마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향의 아줌마는 ‘미쓰’같은 늘씬하고 고급진 여자다. 자기 관리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하고 자기 일도 잘하는 그런 아줌마다. 회사 다니면서도 포기를 했던 슈퍼우먼인데, 집사람이 되면서부터 ‘번뇌의 두어 달’ 동안에는 그 이상향에 나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노력하면 될 줄 알았다. 어쩌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엔 육체적으로도 나이가 많았다. 실제로 가정주부 과로사에 대해 검색도 해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그 이상향 아줌마를 버렸다. 스스로 놓아버리니 마음도 편해지고 과시할 것도 없어졌다. 놀러온 아이 친구 엄마에게 자연스럽게 ‘나는 살림 못한다’라고 선언하고 그대로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수입이 줄어 들어서 ‘이제 돈 없어서 힘들다’라는 말도 할 수 있다. 아직도 내려놓아야 할 게 많지만, 하나씩 내려놓으므로써 조금씩 ‘삶이 편안해지는 아줌마’가 되고 있다. 

 다음 단계 목표는 활기찬 모습으로 삶을 사랑하는 아줌마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과 잘 놀고, 살림에 흥미를 갖고, 내 주변 것들을 온전히 느끼며 사랑하는 아줌마가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내 주변 모든 것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합을 이루지 않을까. 현실을 직시 하고 인정하고 즐기면, 나 스스로가 참 행복해질 것 같다. 자꾸만 꿈틀대는 꿈들을 현실과 타협하면서 슬기롭게 잘먹고 잘살고 싶다. 

 

* 참, 아줌마가 되면서 큰 장점이 하나 있다. 드라마 많이 볼 수 있다. 으하하하하하하하 밀린 드라마 많이 봐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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