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있을 때 캥거루를 실물로 본 것은 멜버른 동물원과 필립 아이랜드에 갔을 때다. 둘 다 친구가 놀러 와서 갔었다. 동물원을 제법 좋아하지만 차가 없다 보니 이동이 어려워 혼자서는 엄두를 못 냈었다. 그래서 차가 있는 친구가 와서야 만 갈 수 있었다. 멜버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했던 건 거기에 다녀온 친구들이 있었고 거기에 있는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친구들이 없었다면 나는 호주 가서 캥거루 한번 못 보고 왔을 것이다.
호주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동물이 코알라와 캥거루인데, 코알라는 그냥 코알라다. 연예인중에서 어떤 연예인들은 실물로 봐도 '와~연예인이다'라는 말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 너무 똑같거나 현실감이 없어서다.
그런데 캥거루는 '엇.. 캥거루?'라는 말이 나온다.
캥거루의 반전 매력 때문이다. 맑고 청순한 캥거루의 눈 위로 긴 속눈썹이 나붓거리듯 깜빡이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한참을 빠져 바라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호주의 상징이 코알라가 아니라 캥거루인게 바로 수긍된다.
그런데, 자자, 이런 캥거루를 조금만 내려서 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너, 이리 함 와볼래?"
그렇다. 이 근육질. 이런 반전매력이 있다. 사람 키만 한 애가 근육을 뽐내고 있으면 위화감이 들어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 찍어둔 사진이 날아가서 제대로 근육을 담아둔 게 없어서 아쉽다. 캥거루가 권투 하는 이미지나 게임이 있잖은가, 그럴법하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순한 건지 순한 애만 둔 건지 관람객이 먹이를 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영상 속에서 보는 캥거루들은 야생 캥거루라 온순하지 않은 가보다.
www.youtube.com/watch?v=jlM09n8JQT8
나는 코스모스를 볼때마다 캥거루가 떠오른다. 그건 코스모스가 캥거루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가을소녀같이 하늘하늘 청초한 모습의 코스모스가 어떻게 캥거루 같냐고? 코스모스가 한참 피어날 때 뿌리째 뽑아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그 줄기가 어찌나 두껍고 강한지, 뿌리가 얼마나 넓게 퍼져서 일대를 점령하는지 말이다. 이 반전 매력의 무서운 코스모스를 한번 접하고 나면 쉽게 볼 식물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일 년이 지나서 보니 코스모스가 심어져 있던 곳마다 새싹이 올라오는 모습에 기겁하며 뽑아내고 있다. 옆 들판 같은 곳에 흩뿌리려고 씨앗들을 열심히 채취했는데도 많이도 남아 있던 모양이다. 이제는 이 작은 새싹 하나가 나무 한그루처럼 커 나갈 수 있음을 안다. 내가 아끼는 꽃과 나무들에게 그늘을 만들 테고 흙들을 다 점렴할 것이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올라오는 코스모스 새싹들을 이번 주도 몇십 개를 뽑아냈다.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장관이여서 올해도 코스모스를 많이 보길 바라지만, 밭이며 꽃밭이며 모든 곳을 점령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이 캥거루 같은 반전 매력의 꽃이여, 제발 낄낄빠빠하길 바란다. 작은 풀 한 포기에도 감격하던 나는 1년 만에 쓸모가 있음과 없음의 판단으로 무참하게도 벌레를 살생하고 생명을 뽑아내는 인간, 그 존재가 되었다.
개구리가 많다고 무참히 밟아 죽였다는 어느 스님의 일화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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